라마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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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마 1세는 1782년 차크리 왕조를 창건하고 1809년 사망한 태국의 국왕이다. 아유타야 왕조의 사관 출신으로 톤부리 왕조의 딱신 왕의 신하가 되어 군사적 공을 세웠으며, 1782년 쿠데타로 왕위에 올라 톤부리에서 방콕으로 천도하고 차크리 왕조를 개창했다. 재위 기간 동안 버마의 침공을 격퇴하고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으며, 삼표법 제정, 문학 작품 재편집, 사찰 건립 등 내치에도 힘썼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태국에서는 매년 4월 6일을 차크리 기념일로 지정하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딴 다리와 동상이 있다.
아유타야 왕가의 혈통을 이은 톤 두원(태국어: ทองด้วง)은 아유타야 시대의 관리 코사판 후작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아유타야 왕조 말기 관리로 근무하며 루앙욕 클라밧 작위를 받았다. 훗날 라마 6세에 의해 라마 1세라는 칭호를 받았다.
2. 생애
1767년 버마가 아유타야 왕조를 점령하자, 이듬해 중국계 탁신이 버마군을 몰아내고 톤부리 왕조를 세웠다. 톤 두원(라마 1세)은 탁신 왕의 신하가 되어 탁신이 라용에서 군사를 일으켰을 때 탁신의 어머니를 안전하게 보호한 공로로 프라 라차왈린으로 승진했다. 이후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여 맹장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아파이 로난릿 백작, 요마라트 후작, 짝크리 공작, 마하 카삿숙 대공으로 차례차례 승진했다.
톤부리 왕조의 탁신 왕이 말년에 정신 착란을 일으키자, 마하 카삿숙 대공(라마 1세)은 국내 혼란을 우려하여 캄보디아 원정을 중단하고 톤부리로 돌아와 탁신 왕을 처형했다. 태국 역사서에는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 왕으로 추대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위에 오른 후, 붓다 요드파 출라로께로 이름을 바꾸고, 짜오프라야 강 건너편 동쪽에 방콕(끄룽텝)을 건설하여 천도하고 차크리 왕조를 열었다. 아유타야 왕조의 신권정치를 계승했다.
라마 1세는 즉위 후에도 여러 차례 버마의 침공을 격퇴하고 국내를 안정시켰다. 국내가 안정되자 『삼인법』을 정비하고 관제를 정비했다. 또한 아유타야 왕조의 후손임을 내세우기 위해 학자들을 등용하여 버마 점령 시대에 유실되었던 문학 작품 라마키엔, 이나오를 재편집했다. 오늘날에도 라마 1세가 편집한 라마키엔은 여러 라마키엔 중에서도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관광지로 유명한 왓 프라깨오(에메랄드 불상 사원)도 그의 건설에 의한 것이다. 그는 비엔티안에서 빼앗은 에메랄드 불상을 이곳에 안치했다. 이 외에도 많은 사찰을 건립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이름을 딴 유명한 것으로 차오프라야 강에 놓인 최초의 큰 다리인 프라풋타요트파 다리 등이 있다.
2. 1. 초기 생애
통두앙은 1737년 아유타야 왕조 보롬마콧 왕 재위 시절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몬족[16] 귀족 통디였고, 어머니는 중국계 혼혈인[7][8][9] 다오르엉(본명 요크)[7]이었다. 통디는 '프라 악손 슨톤삿'(북부 시암의 왕실 서기관, 왕실 인장 보관자)이었으며, 나라이 왕 시절 프랑스에 파견된 코사 판의 후손이었다.[5][6]
통두앙은 어린 시절 웃툼폰 왕의 시종으로 왕궁에 들어가 탁신과 어린 시절 친구가 되었다. 1757년, 21세에 시암의 관습에 따라 승려가 되었다. 1760년에는 낙과 결혼했다. 아유타야 왕조 말기, 엑카탓 왕에 의해 라차부리주의 부지사(루앙 요크라밧)로 임명되었다.[3]
2. 2. 톤부리 왕조 시기
1767년 버마의 침략으로 아유타야 왕조가 멸망한 후, 탁신이 버마군을 몰아내고 톤부리 왕조를 세우자 그의 신하가 되었다.[10] 톤 두원(라마 1세)은 탁신이 라용에서 군사를 일으켰을 때 탁신의 어머니를 안전하게 보호한 공로로 프라 라차왈린으로 승진했다.[10] 이후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워 맹장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프라 랏차린(경찰청장), 프라야 아파이론나릿, 프라야 욤마랏, 프라야 차크리, 솜뎃 차오프라야 마하 카삿수엑 등 고위직을 역임했다.
1774년 란나를 버마의 지배에서 해방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1778년에는 라오 왕국들을 정복하는 등 군사적 업적을 세웠다.
2. 3. 짜끄리 왕조 개창
1781년, 캄보디아 원정 중 톤부리에서 프라야 순의 반란으로 탁신 왕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귀환했다.[4] 톤부리에 도착한 후, 차크리 왕조의 창시자인 차오 프라야는 그의 군대와 함께 프라야 순을 물리쳤다. 일부 자료에서는 탁신이 사원에 유폐되었다고도 한다.[4] 여러 사료들에서 폐위된 탁신을 처형했다고 널리 알려졌는데, 이는 이전 자료들과는 모순된다.[4] 이후 권력을 장악하고 스스로 왕이 되어 차크리 왕조를 건설했으며, 이 왕조는 오늘날까지 태국을 통치하고 있다.[4]
마하 카삿수엑 장군은 1782년 4월 6일 스스로 즉위식을 거행했다.[4] 얼마 후, 그는 여러 가지 이유로 시암의 수도를 차오프라야 강 동쪽 기슭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 이유에는 더 나은 전략적 위치와 백지에서 시작하여 그의 정통성을 높이려는 욕망이 포함되었다.[4] 그는 새로운 수도의 이름을 "랏타나코신"("옥불을 모시는 곳")으로 정하기로 결정했다.[4] 즉위하면서 그는 아유타야 왕국을 건설한 우통과 마찬가지로 ''라마티보디(Ramathibodi)''라는 이름을 사용했다.[4] 그의 완전한 칭호는 훨씬 더 길었는데 (''프라 보롬마라차티랏 라마티보디 시신 보롬마하 짝크라팟 라차티보딘'' 등), 이전 시암 왕들처럼 그의 보편적인 권력 주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4]
태국의 역사서에서는 차오프라야가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 왕으로 등극하였다고 나온다.[3] 왕이 되었기 때문에 이름을 붓다 요드파 출라로께로 바꿨으며,[3] 짜오프라야 강을 사이에 두고 맞은 편인 동쪽에 방콕 (정확하게는 끄룽텝) 을 건설하여 천도 한 후,[3] 아유타야 왕조의 신권정치를 계승했다.[3]
라마 1세는 또한 그의 가족 구성원 여러 명을 왕족으로 봉했다.[4] 그는 그의 형제 수라시(아누칫 라자) 또는 마하 수라 싱하낫을 "전궁"(왕세자이자 부왕의 관례적 칭호)으로, 그의 조카 텅-인 또는 아누락 데베시를 "후궁"으로 임명했다.[4]
3. 업적
라마 1세(본명: 톤 둔)는 아유타야 왕조의 혈통을 이었으며, 아유타야 시대 장교였던 코사판 후작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몬족[16], 어머니는 중국계 태국인이었다.[17][18] 아유타야 왕조 말기에 이미 관리로 근무하고 있었으며, 루앙욕 클라밧의 작위도 가지고 있었다.
1767년(태국 불력 2310년) 아유타야 왕조가 버마에 점령당한 후, 이듬해 탁신이 버마 군대를 격퇴하고 톤부리 왕조를 건국했다. 라마 1세는 탁신 왕을 섬기며, 탁신이 라용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 탁신의 어머니를 보호하는 등의 공로로 맹장으로 알려졌다.
탁신 왕이 말년에 정신 착란 상태에 빠지자, 캄보디아 원정을 중단하고 톤부리로 돌아와 탁신 왕을 처형했다. 이후 백성에게 추대되어 왕위에 오른 그는 '''프라바트솜뎃 프라 풋타요트파 훌라록'''으로 이름을 바꾸고, 방콕을 건설하여 천도한 후 차크리 왕조를 개창했다.
훌라록(라마 1세)은 여러 차례 버마의 침입을 격퇴하고 국내를 안정시켰으며, 아유타야 왕조의 신권 정치를 계승했다. 또한 많은 학자들을 등용하여 버마 점령 시대에 유실되었던 문학 작품을 재편집했다.
3. 1. 내치
쭐라록 왕(라마 1세)은 즉위 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버마 침공군을 몰아내고 국내를 안정시켰다. 국내가 안정되자, 《삼인법》을 제정하여 관료 제도를 정비했다. 또, 아유타야 왕조의 후예임을 강조하고자 많은 학자들을 등용하여 버마 점령 시대에 사라진 문학 작품 라마키엔, 이나오를 재편집했다. 오늘날에도 라마 1세가 편집한 라마키엔은 여러 라마키엔 중에서도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관광지로 잘 알려진 왓 프라깨오(에메랄드 사원) 등 많은 사원을 지었다. 이곳에 쭐라록은 비엔티안에서 가져온 에메랄드 불상을 안치했다. 그의 이름을 딴 유명한 건축물로는 차오프라야 강 위에 가설된 최초의 대교인 사판 프라풋타요트파 대교 등이 있다.
3. 2. 외치
라마 1세는 즉위 후 여러 차례 버마의 침공을 막아내고 국내를 안정시켰으며, 베트남과 캄보디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
1784년부터 1785년 사이, 응우옌 아인(Nguyễn Ánh)은 라마 1세에게 떠이선 왕조가 지배하던 베트남을 공격할 군대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응우옌-시암 연합 함대는 메콩 삼각주 지역에서 벌어진 라치검-소아이뭇 해전에서 패배했다.[11] 이 사건으로 시암은 응우옌 왕조에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응우옌 아인은 시암에 피신하여 떠이선 왕조를 물리칠 기회를 기다렸다.[12]
캄보디아에서는 1779년 앙 농 2세가 폐위되고 앙 엥이 왕위에 올랐으나, 앙 엥 치하의 친베트남 정책은 라마 1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라마 1세는 앙 엥을 방콕으로 압송하여 자신의 양자로 삼아 친시암 감정을 심어주려 했다. 또한 차오 프라야 아바야 부벳을 캄보디아의 섭정으로 임명했다. 1794년, 앙 엥이 성년이 되자 라마 1세는 그를 네아레아이 레아체아 3세로 복위시켰다. 시엠레아프와 바탐방 주변 지역은 시암에 합병되었고, 아바야 부벳이 통치했으나, 라마 1세는 이 지역이 캄보디아의 전통에 따라 통치되도록 허용했다.
1785년부터 1786년까지 버마의 보도파야 왕은 시암을 침공했다. 버마군이 9개의 군대로 쳐들어왔기 때문에 시암에서는 이 전쟁을 "9군 전쟁"이라고 불렀다.[4] 버마군은 란나와 시암 북부로 쏟아져 들어왔다. 람팡 왕자 카윌라가 지휘하는 시암군은 용감하게 싸워 버마군의 진격을 늦추면서 방콕에서 오는 증원군을 기다렸다. 핏사누록이 함락되자, 라마 1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향했다. 시암군은 버마군의 포위 공격으로부터 람팡을 구원했다.
남쪽에서는 보도파야가 체디 삼옹에 주둔하여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라마 1세의 동생인 부마는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가서 나콘 시 탐마랏을 거쳐 라농으로 오는 버마군을 공격했다. 그는 깐차나부리 근처에서 버마군과 전투를 벌였다. 버마군은 탈랑(푸껫)을 공격했으나, 찬과 묵 자매가 지역 주민들을 모아 버마군에 맞서 탈랑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찬과 묵은 버마 침략에 저항한 공로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라마 1세는 그들에게 타오 텝 카삿리와 타오 스리 순톤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버마군은 송클라를 점령했다. 팟탈룽의 총독들은 도망쳤으나, 프라 마하라는 승려가 지역 주민들에게 무기를 들고 버마군에 맞서 싸울 것을 격려했고, 그의 작전도 성공적이었다. 프라 마하는 나중에 라마 1세에 의해 귀족으로 승격되었다.
보도파야는 군대가 격파되자 후퇴했다. 이듬해 그는 다시 공격하여 군대를 하나의 부대로 구성하여 체디 삼옹 고개를 지나 타 딘 댕에 주둔시켰다. 부마는 시암군을 이끌고 보도파야와 맞섰으나, 짧은 전투 끝에 보도파야는 패배했다. 이 짧은 전쟁은 타 딘 댕 전투라고 불린다.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조부 | 프라야 랏차니쿨 |
조모 | (알 수 없음) |
부친 | 텅디상왕 |
모친 | 욕상왕후 |
남동생 | 람나롱 왕자 |
남동생 | 수라싱하낫 부왕 |
여동생 | 텝수다와디 공여 사공주 |
여동생 | 스리수다락 공여 깨우공주 |
왕후 | 아마린트라 왕후 |
후궁 | 핌수안, 뿌이, 잔타, 두앙, 쿰, 너이캐우, 누이야이, 너이, 엠, 품, 따니, 픙야이, 빠쿠마, 님, 우, 임, 주이, 누알, 텅, 우이우, 빤, 씸, 뻠, 누암, 텅숙, 크린, 픙렉, 씸약, 훈, 찹, 우엔, 홍, 분낙, 운, 짓, 섬, 추, 녹, 홍, 쁘릭, 임, 텅, 텅디 |
왕자 | |
왕녀 |
5. 사후
1809년 9월 7일, 라마 1세는 짧지만 급성 질환으로 사망했다.[13][14]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이사라순혼 왕자가 불타 롯라 나팔라이(라마 2세)로 즉위했다.
태국에서는 매년 4월 6일을 "차크리 기념일"로 지정하여 차크리 왕조의 창시자인 라마 1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그의 이름을 딴 메모리얼 브리지(프라 풋타요트파 기념 다리) 앞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2014년 발행된 500바트 지폐 뒷면에는 라마 1세 동상, 왓 프라 체투폰 빔올망클라람 라자와라마하위한(왓 포), 프라 수멘 요새의 이미지가 그려져 있다.[15]
참조
[1]
서적
Thailand: A Short History
https://books.google[...]
Yale University Press
2003
[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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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7
[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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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University of Arizona Press
[4]
서적
Siamese Resurgence: A Thai Buddhist Voice on Asia and a World of Change
Asian Cultural Forum on Development
[5]
서적
A History of Thailand
https://archive.org/[...]
Cambridge University Press
[6]
웹사이트
The following article was written by King Rama IV of the Kingdom of Thailand in 1855 in response to the British Governor to Hongkong. And another related article from The Nation newspaper on 13 December 1999
http://www.mrc-usa.o[...]
2007-10-1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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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pa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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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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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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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action Publishers
[1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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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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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rchiv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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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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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plinger
[14]
서적
Thailand : A Short History
Silkworm Books
2003
[15]
웹사이트
500 Baht Series 16
https://www.bot.or.t[...]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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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Wiley-Blackwell
[17]
뉴스
Rama I
https://www.britanni[...]
브리타니카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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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Down Sampeng Lane: The Story of Bangkok's China T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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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AMedia
[19]
백과사전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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